비겁함과 비밀에 둘러싸여
한없이 넓게 펼쳐진 하늘 아래 모든 왕국에서 내게 가장 거친 왕국이 주어졌다. 내 영토의 절반은 덩굴에 숨막힐 듯 휘감겼으며 모든 뿌리와 바위가 내 통치에 맞서 음모를 꾸민다.
부하들은 어찌나 심약한지 옛 유적들의 통제권을 차지할 수 없다. 수중 무덤 속에 숨겨진 덫에 부하들은 해충 마냥 뿔뿔이 흩어진다. 녀석들 중 어느 하나도 감히 사원에 망치질을 가하고 잿더미로 만들어 다시 한번 질서를 바로잡을 엄두를 못 낸다. 차라리 동쪽으로 발길을 트는 게 나으려나... 그곳 봉우리들은 아직 기억의 망령이 시달리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는 매년 벌어지는 연회에 날 불러냈는데 점잖은 척 가식이나 떠는 지겨운 그 자리 때문에 내 왕좌를 무방비 상태로 비워야만 한다. 어떤 위협이 도사리는 건지 안 보이는 건가? 함께 협잡하고 일을 꾸미는 신들을 상대로 국경이 유일한 방어선인데 말이다! 어쩌면 내게 날아온 초대장은 또 하나의 함정이자 자칫하면 빠져 죽을 무덤일지도 모른다...!
...바보 같은 생각이다. 덩굴에 정신이 도취된 나머지 망상에 휩싸이고 말았다. 난 의무가 명하는 대로 연회 자리에 참석하고 그들에게 "야간 성소"가 아니라 발리스타를 더 지으라고 재촉할 것이다. 말 없는 무리에게 내미는 지혜라... 정말이지 내 혈족들은 고대인의 비밀에 홀려 점점 분별없이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좀 쉬어야겠다. 동이 트기 전에 궁정까지 기어들어온 어느 방랑자를 만날 것이다. 그자는 저 너머에서 선물을 갖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려 한다. 그 덕분에 기분 전환은 할 수 있을 테지.
— 군주 보르고스, 북부의 수호자
오늘 생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조우했다
방랑자는 약속대로 D.A. 492년 연중 49일에 도착했다. 사내 뒤로 살이 에는 듯한 돌풍이 뒤따라 들어왔다. 사내가 알현실에 들어서자 그가 발 딛은 자리에 불길한 안개가 끼었다.
남자는 망토로 얼굴을 가려 병자 같은 안색을 가렸는데... 난생처음 보는 몰골이었다. 방랑자의 살결은 창백하고 곳곳에 파란 반점이 있었으며 얼굴은 오래 전 중풍을 앓은 것처럼, 혹은 평범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반씩 조립한 것처럼 서로 대칭이 맞지 않았다. 이렇게 가련할 수가.
깡마른 두 손으로 밝게 빛나는파란색 병을 꺼냈는데 초의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내는 그게 무기라고 했다. 고대인
이 우리에게 숨기고 있었던.... 비밀 말이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난 오래 전부터 사기꾼 놈들이 자신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보여주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터이니 말이다.
난 그 병을 움켜잡고 수수께끼의 내용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아주 작은 입자의 가루들이 내 시야 가장자리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주변에 안개가 솟아오르며 날숨을 내뱉을 때마다 내 주변을 감쌌고... 내 안으로 스며들어 심장과 두개골 안으로 파고들고 두 눈 속에 자리를 잡았다. 날 끌어당기고 있었다. 위로, 또 내 눈알을 향해서, 두 발이 궁정에 깔린 카펫을 떠날 때까지 퍼덕였다.
공중 부양.난 유적 위로, 해충과 겁쟁이들, 거짓말쟁이들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발 밑의 익숙한 대지와 다시 하나가 됐을 때 방랑자가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내는 내가 그를 공격할 수단과 사유를 모두 제공했다.
두 손이 아직 떨리지만... 칼자루를 단단하게 쥐어야 한다.
— 북부 수호자이자 림가드의 지도자, 보르고스 군주
어쩔 수 없이 가족의 재화합에 참가했따
영원을 맛본 지금은 정말 하찮은 추구가 아닐 수 없지만... 아무런 계획도 없이, 확실히 설득해낼 논쟁력 없이 가지는 않았다.
엘릭서 단 한 방울이면 포도주의 맛이 감미로워진다. 고작 그 한 방울에 고르만더 그 바보는 참모들과 기술자를 죄다 불러냈다. 그들은처음엔 엘릭서 우물 건설에 반대할지 모르나, 금방 사라질 말들이다.
하지만 제즈미나의 입을 막으려면 재빠르게 뒷공작을 벌여야 한다. 제즈미나는 고대인이 아직도 그런 엄청난 힘을 감춘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으니... 그녀가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따로 업자를 시켜서 우물을 지을 것이다. 제즈미나의 우는 소리가 흐느낌으로 사그라들었을 때 난 강제로 그녀의 두 눈을 벌리고 거짓 속의 진실을 고했다.
고대인은 바로 이 비약을 우리에게 숨겼다고!
고대인들은 잠자는 뱀이지만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두려워서 감히 깨울 수가 없다고 말이다! 정말 겁쟁이가 따로 없다! 변장한 용 앞의 쥐새끼나 다름 없는 꼴이라니까!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 것이 마땅하다. 조금만 더 깊이 파면... 과연 저 밑엔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대지의 혀를 가르고 활짝 벌려 피가 철철 흐르게 한다면 그 비밀을 모조리 토해낼까?
난 방랑자의 후드 아래를 감도는 안개와, 씰룩거리는 그의 그림자와, 수백 개의 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입김만을 믿는다
그 사내만이 우리를 일으켜세우리라
우리를 공중에 띄우리라
쥐 떼를 인간으로 만들어내리라
— 군주 보르고스, 북부의 수호자
오늘 엘릭서 우물 건축자와 만났다
"건축가"란 말은 너무 거창할지도 모르겠다. 청사진은 여행자가 전해준 것이었으니 말이다. 기술자와 건축가 무리는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비석처럼 생긴 이 건축물은 이중이며 석양과 잠든 핵을 향해 뻗어나간다. 위에는 텅 빈 왕관이 있어 스러져가는 달빛을 그 안에 가둔다. 그 그림자도 돌 만큼이나 새카맣다.
저 밑에서 전설 같은 안개가 솟아오른다. 대다수는 보지 못했거나 그런 체한다. 내가 안개 이야기를 꺼내자 인부들이 침묵에 빠졌다. "건축가"는 고르지 못한 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는데... 정작 아래로 숙인 머리는 내뱉은 말과 정반대였다. 그는 날 광인으로 오해한다.
내 방랑자가 오른편에 있다가 앞으로 나가 말문을 열어 침묵을 깼다.
"약간의 안개는 예상된 바입니다. 해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안개를 반겨줘야 마땅한 일이겠죠." 그 말이 내 머릿속에 울렸다.우린 안개의 도착을 반겨야 한다.
그래, 안개가 우릴 인도해줄지도 모른다. 우리의 손을 잡아끌 것이다. 우리의 떨리는 손,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떨리는 손이 흔적을 남긴다. 유령 같은 윤곽의 반향하는 자취를
자신의 잔상에 매인 분노가 그 자취를 쫓아 희미해지는 파란색의 비네트를 빙빙 돌리고
두 눈꺼풀은 달을 향해 치켜올렸으며
거짓 속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의,
그리고 영원의 떠오르는 소용돌이 속에서 진실을 말한다
안개의 도래를 환영하라
— 북부 수호자이자 림가드의 지도자, 보르고스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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